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형양 · 성고 전역 (문단 편집) ==== 경색전투의 승리와 장한의 사망 ==== 이렇게 외교전을 통해 항우의 발을 묶는 사이에, 군사적으로도 초군의 발을 묶을 필요가 있었다. 팽성대전 승리 이후 초군은 끝도 없이 서진을 계속하기 있었기 때문에 이를 어떻게든 저지할 필요가 있었던 것. 당시 유방은 하읍을 시작으로 양(梁)[* 안후이 성 쑤저우 시 일대.], 우현(虞縣)[* 허난성 [[상추시]] 우청현.]을 거치며 계속해서 서쪽으로 물러나고만 있었다. 이렇게 밀리기만 할 수는 없었기에, 유방은 형양[* 허난성 [[정저우시]] 싱양시.]을 기점으로 수비라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유방이 형양에 버티고 서 있자 [[한신]] 등 팽성에서의 대패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여타 장수들은 휘하 패잔병을 이끌고 속속 몰려들었고, 여기에 더해 관중에 있던 소하가 23세 이하 · 56세 이상의 병역 비해당자마저 싹싹 긁어 형양으로 보내는 통에 어떻게든 구색은 갖출 수 있었다. 유방은 이렇게 병력을 수습하는 한편 영포가 벌어주는 시간을 통해 잠시 후방으로 이동해 훗날의 [[혜제(전한)|혜제]]인 아들 유영(劉盈)을 태자로 삼고 역양(櫟陽, 약양)[* 산시 성 시안 시 옌량 구.]을 지키게 하며, 대사면령을 내려 민심을 수습했다.[* 당시 유방의 상황이 좋지 않았기에 죄수들을 민간인으로 석방하여 병력으로 충원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수도 있다. 당시 관중에는 대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다른 지역으로 도주하여 밥을 먹을 정도였으니, 이 지역의 인력 충원과 보급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탈탈 털어서 싸우는 수준.] 이런 식으로 어느 정도 전력을 수습한 유방은 [[관영]](灌嬰)을 기병대장으로 삼아 한군의 기병대를 창설하고, 승리의 여세를 몰아 진격해 오는 초군을 형양 주변의 경읍(京邑)[* 허난 성 싱양 시 징청루 가도.]과 색읍(索邑)[* 허난 성 싱양 시 쑤이루 가도.]에서 물리친다. 이 [[경색 전투]](京索戰鬪)에서의 승리로 초나라의 서진을 멈추게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일단 팽성의 대패를 수습한 유방은 역공에 나섰다. 물론 항우를 상대로 공격을 감행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한군의 세력으로는 초군을 막기만 하는 것도 벅찼으므로 역공은 꿈만 같은 소리였고, 대신 항우의 편에 붙은 제후들을 타격하여 세력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었다. 유방에게 전면에서 오는 항우의 존재가 압도적인 만큼, 후방의 위협은 결코 간과할 수 없었다. 유방은 숨돌릴 틈도 없이 형양 일대에서 군사를 몇부대로 쪼개 곳곳으로 흩어져 팽성대전이 일어나자 뒤통수를 친 반란군을 쳐부수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방이 평정한 [[삼진]]의 땅에서는 오직 [[장한]]만이 폐구성(廢丘城)에서 포위된 지 아홉 달이 되도록 끈질기게 버티고 있었다. 유방은 폐구성으로 물을 흘려보내 성이 물에 잠기게 했고, 가망이 없어진 것을 깨달은 장한은 구차하게 사는 것을 바라지 않고 목숨을 끊어 자살해 버리고 만다. 이렇게 후방의 위협인 장한과 반란군을 제거한 유방은 관중의 병력을 동원해 변경을 지키게 조치했다. 이후에도 유방은 한동안 전방인 형양과 후방인 역양(약양)을 오고가며 민심을 수습하고 병력을 다독이는 데 힘을 썼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